작성일 : 17-09-28 17:41
[105호] 시선 하나 - 청소년의 삶에 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요?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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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삶에 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요?

-‘촛불청소년’이 묻고, ‘촛불청소년인권법’이 답하다

배경내


최근 발생한 학생들의 폭력 사건을 두고 많은 이들이 엄벌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폭력적이 되었냐’며 혀를 차는 이들도 많지요. 그런데 정말 ‘아이들’만 문제였을까요?
최근 서울의 건대 앞에서 일어난 ‘240번 버스사건’에서 ‘어른들’이 보여준 행동은 어떠했나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도 전에 버스기사에 ‘집단 다굴’을 가했고, 아이 혼자 내리는 것도 모른 ‘맘충’이라며 혼비백산했을 아이엄마를 비난하지 않았나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태를 탓할지언정 ‘어쩌다 어른들이 이렇게 되었나’라며 혀를 차지는 않습니다. 청소년 한두 사람의 잘못은 집단으로 매도되는데, 비청소년(‘어른들’)의 잘못은 집단으로 매도되는 일이 드물다는 이야기입니다. 특정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하거나 문제 있는 존재로 취급하는 태도는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나이주의로 다양하게 변주돼 온 차별의 밑거름이 아니었나요?

# 폭력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인권의 촛불을 든다는 것

2017년, 촛불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열었다는 한국사회의 오늘을 봅니다. 시교육청의 땅이고 특수학교 부지로 이미 공고된 곳에 한방병원을 설립해주겠다는 정치인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약으로 사기 치냐.’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돌아가야 할 화살은 외려 엉뚱한 곳을 향해 장애학생을 위한 학교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부모들과 교육청을 향했습니다. ‘왜 강서구에만 장애인이 이렇게 많냐.’ 사람이 일하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죽어나가도 기업은 이윤을 거둬들이는 데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육의 풍경은 또 어떻습니까. 학생에게 각목을 휘둘러도 ‘사회상규’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지도였다며 기소조차 되지 않은 교사가 있습니다. 최근 학교현장에서 연이어 터지고 있는 성폭력 사건들도 학생들이 처한 일상의 위협을 잘 보여줍니다.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청소년들이 부당한 대우와 멸시에 학교로 돌아오려 해도 ‘그 정도는 견뎌야 사회생활한다’며 복귀를 막는 학교도 있습니다. 약자를 짓밟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고, 그래야 비로소 강자가 된다고 사회가 대놓고 때로는 은밀하게 가르치는 셈입니다.

부산 폭력사건이 가볍다는 이야기도, 가해학생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는 무죄인 양 말해서는, 청소년만 문제인양 말해서는 너무 염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 겁니다. 가해자 신상을 털고 소년법 폐지를 요구하는 그 수십 만 명의 에너지가 썩은 사과를 도려내는 데 급급하지 않고 썩은 상자를 고치는 일에 쓰인다면, 비슷한 잔혹상을 마주할 가능성이 조금은 더 낮아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 곁에는 가혹한 현실에서도 인권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학대와 다름없는 학습노동에,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승자독식의 메시지에 짓눌리던 청소년들이 사회적 지배적 가치를 거슬러 세월호 진실규명과 민주주의의 촛불을 함께 들었습니다. 광장을 경험한 청소년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묻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새 역사를 썼다는 ‘촛불’ 이후에도 왜 우리는 아직도 시민이 아니냐고, 인간이 아니냐고, 이것이 과연 민주공화국의 학교냐고 말입니다. ‘청소년이라고 무시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욕설과 모욕 없이 평화롭게 수업 받고 싶다, 우리를 통제하는 법이 아니라 지원해주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너무 거창한 요구냐고 말입니다.

# ‘촛불청소년인권법’으로 화답하자

촛불청소년인권법은 바로 이 청소년들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출발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왜 청소년인권에 이토록 무관심할까. 입시공부에 죽도록 매달려 개인적으로 삶을 조금 나아지게 하는 것보다 정치를 통해 청소년이 직접 사회를 바꾸게 하는 것이 훨씬 평등한 세상에 가까워지는 일이 아닐까. 청소년 참정권이 바로 그러한 세상을 열 수 있기에, 청소년으로 하여금 계속 비정치적인 인간으로, 정치에 미성숙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세계 대다수 나라들이 18세 선거권을 넘어 더 낮추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고, 이미 16세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도 있는데 한국은 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을까. 만18세 선거권 주장이 나온 지도 몇 십 년이 넘었는데, 만18세로 선거연령이 낮아져도 청소년의 극히 일부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인데, 만18세는 너무 높은 정치적 장벽을 쳐두는 게 아닌가. 청소년은 왜 자기 집단을 스스로 대표할 수 없는가. 이런 질문들이 선거관련법 개정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학생을 시민이 아닌 신민으로 길러내는 학교, 학생을 겁먹은 시민/노동자로 만들어내는 학교를 과연 민주공화국의 학교라고 볼 수 있는가.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대표는 참여조차 할 수 없는데, 학생은 학교의 주인이라는 말은 지독히도 모순적이지 않은가.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 사이의 격차 역시 중요한 불평등의 문제가 아닌가. 혐오세력들이 ‘인권’이 들어간 모든 조례에 반대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육청과 지방의회의 장벽을 넘어 지역 차원의 조례를 만드는 일은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이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학생인권기준을 명확히 하고 교육청의 책무를 구체화하는 학생인권법 제정에 주목하게 했습니다.
몇 해째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가 OECD 국가 중 연속 꼴찌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또 어떤가. 꼴찌여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 참혹함에 분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낮은 행복지수는 학대수준인 장시간 학습시간과 과연 무관할까. 장시간 노동이 노동자에게 시민으로서의 삶을 빼앗는 것처럼, 장시간 학습은 청소년에게도 시민으로서의 삶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알바현장에서, 복지시설에서, 학원에서 인권침해가 벌여져도 의지할 법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청소년을 통제하는 법은 많은데, 청소년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지지하는 법은 왜 이토록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이런 질문들이 어린이청소년인권법을 기본법으로 만들 필요를 절감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인권과제를 ‘촛불청소년인권법’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청소년인권 보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초석임을, 청소년인권을 배제?억압해온 현실 역시 청산되어야 할 적폐임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민주공화국의 학교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으로 이어져야 함을 촛불혁명을 이루어낸 청소년과 비청소년 시민들이 함께 말하자는 뜻입니다.

이 사회가 나의 존엄과 인권을 지지한다는 믿음, 사회적 약자/피해자를 지원한다는 신뢰, 시민이자 구성원으로 대접받는다는 자부심은 비청소년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필요한 마음 아닐까요.
9월 26일 출범한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2018지방선거를 청소년이 참여하는 첫 번째 선거로 만들자는 다짐으로 열심히 뛰어보려 합니다. 울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도 지역제정연대도 꾸려지고 있습니다. 그 길에 함께해주실 거죠?


※ 배경내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이며,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