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6-28 14:25
[114호] 여는 글 - 사법농단이라니, 농담인가요?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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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이라니, 농담인가요?

이선이



壟斷. 한글로 ‘농단’, 네이버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시장의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자기 물건을 팔기에 적당한 곳으로 가서 시리(市利)를 독점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나 대상을 제 이익(利益)을 위해 간교(奸巧)한 수단(手段)으로 좌지우지하는 것을 이름”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참 만나기 힘든 이 단어를 우리는 지난 촛불 혁명 때, 무수히 말하고 들었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국정농단. 혹시 ‘농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이없던 그들의 행태에 우리는 너나없이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감옥에 가면서, 사전 속 낱말로 돌아간 줄 알았던 ‘농단’이 다시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사법부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특별조사단이 2018. 5. 25.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정말 충격적이다. 법원 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개별 사건들을 거래목적물로 삼아 청와대와 광범위하게 접촉해왔고, 실제로도 개별 사건에 의견서를 내거나, 판사의 심증을 확인하거나, 전원합의체로 넘기거나 하는 등으로 사건을 관리해왔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장은 직접 문건을 작성해서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물밑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자임하며, 그 사례로 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 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에 둔 판결(통상임금 사건, 키코 사건 등), 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KTX 승무원 사건,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철도노조 파업 사건 등) 등을 내세웠다. 그야말로 ‘헐’이다. 아니 ‘헉’이다. 개인적으로는 입법부나 행정부보다는 그래도 사법부가 좀 멀쩡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사실 이상한 점이 많기는 했다. 예를 들어 통상임금 사건(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서 시간외근무수당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사건)을 보면, 2013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방미일정 중에 GM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달라”는 민원을 듣고는 “꼭 풀어나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법원 판결을 대통령이 무슨 수로 해결하겠다는 거냐고, 3권 분립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 직후인 5월 말, 서울고등법원은 GM 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소송에서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전까지 대법원 판결의 내용으로는, 당연히 노동자가 이기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인 2013년 8월, 대법원은 갑자기 통상임금 사건을 전원합의체 판결로 회부하더니, 그해 12월에 “일할계산해서 지급하는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이 맞지만, 소급분을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한다.”는 논리로 사실상 사용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체불임금은 맞지만, 청구는 못 한다.” 는 판결이 참으로 해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때는 대법관들이 보수적이어서 그런 판결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법원행정처에서 친히 청와대와 대통령의 심정을 헤아려,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판결 내용을 마사지한 것이었다. 무식한 건 박근혜가 아니라 나였나 보다.

시민단체들과 법원 행정처의 사법농단 피해자들은 얼마 전 양승태 前대법원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법률가들은 대법원 앞에서 초유의 천막농성을 시작했고, 법원노조, 공무원노조 등도 엄중한 수사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법원행정처의 사법농단이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만큼이나 민주주의에 해악이 되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청와대에 판결을 상납했고, 이 때문에 중소기업, 노동조합, 해고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처럼, 이번 사법농단 역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 이선이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부설 인권교육센터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