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1-15 17:58
[51호] 2013년을 여는 글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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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인권운동연대


오문완 l 울산인권운동연대 공동대표


연말, 내년도 연대의 새 사업을 제안하는 글을 쓰라는 청을 받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서의 말씀을 끌어댈 것도 없이 2013년은 기존의 사업을 점검하는 한 해였으면 하는 바람에 남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던컨 J. 와츠의 <상식의 배반>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몇 년 전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장기기증에 동의한 시민의 비율이 나라에 따라 낮게는 4.25퍼센트에서 높게는 99.98퍼센트까지 나타났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그 수치가 전반적인 범위에 고루 퍼져 있는 게 아니라 눈에 띄는 두 부류(한 부류는 장기기증자 비율이 한 자리나 10퍼센트대에 머물렀고, 다른 부류는 90퍼센트대 후반이었다)에만 몰려 있고 그 사이 수치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A나라에서는 약 12퍼센트의 시민이 장기기증에 동의한 반면 B나라에서는 99.9퍼센트가 동의했다. 두 나라 시민들의 선택에 격차가 벌어진 것을 설명할 만한 어떤 차이점이 있었을까? 미국 컬럼비아 대학 학생들은 이를 세속적 vs. 종교적, 사고사의 높낮이, 공동체 문화 vs. 개인적 권리로 파악했는데 모두 좋은 설명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A나라는 독일이고 B나라는 오스트리아라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차이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로 생기기도 한다. 창의적이긴 했지만 학생들은 결국 진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는데, 사실 그 이유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단순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기본으로 주어진 선택이 ‘장기기증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던 반면, 독일에서는 ‘장기기증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서식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장기기증자 비율을 12퍼센트에서 99.9퍼센트로 높이기에는 충분했다. 기본 선택을 따를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나 반대 선택을 할 경우에는 서류를 우편으로 다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나타난 이런 결과는 유럽 전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높은 장기기증률을 보인 나라는 모두 ‘반대의사’를 따로 표명해야 하는 서식을 채택했고, 비율이 낮은 나라는 ‘동의’를 따로 표명해야 하는 서식을 썼던 것이다.

노동의 영역에서는 성과급이라는 게 별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은 우리의 상식이라는 게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를 웅변하면서, 그 대안으로 ‘측정과 대응’이라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율이 높으면 진보 성향의 후보가 당선된다는 예측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비상식을 보았습니다. 개표 초반에 투표율이 높은 게 독이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2013년 연대는 상식이 아니라 비상식으로 그간의 사업을 점검하는 것을 새 사업으로 채택했으면 합니다. 지금의 인적 한계로 새 사업을 발굴하는 것이 또 다른 짐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기도 해야 하구요.

그래도 태양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