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12-29 14:41
[108호] 인권포커스 - 평등의 가치를 일구자 - 차별금지법제정
 글쓴이 : 사무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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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가치를 일구자 - 차별금지법제정

이진희


지난 12월 1일 세계에이즈의 날 국회의원 회관에선 청소년에이즈예방캠페인 디셈버퍼스트가 성일종 국회의원의 후원으로 열렸다.
동성애가 에이즈 확산의 주범이며, HIV,AIDS 인권운동을 하는 자들이 가짜 인권을 퍼뜨리고 있다는 비난으로 개회사가 시작되었다. 현장의 인권활동가들은 당사자가 참여했으니 발언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모욕적인 발언과 몸싸움을 치루며 어렵게 얻어낸 1분 발언, HIV/AIDS인권연대나누리+ 의 윤가브리엘은 “왜 나를 혐오 합니까”로 연설을 시작했다. 객석에서 발언을 지켜내고 요구를 알리기 위해 나는 몇몇 활동가들과 마스크를 쓰고 손 펼침막을 들었다. 디셈버퍼스트 참가자들은 손 펼칠막을 뺏으려고 밀치며 이렇게 외쳤다. “그렇게 당당하면 마스크 벗어라” 마스크 안쪽으로 내가 외친다. “당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들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겁니다.” 그 순간 혐오를 표현하는 이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것은 마스크뿐인가?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가? 분노가 복받쳐 눈물이 솟았다. 혐오하는 사람이 더 당당한 이 순간, 그들은 인권과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 현장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는 헌법 11조의 가치를 수호하는 국가는 없었다.

비슷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난 9월 7일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주민토론회에서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 장애학생 학부모들은 무릎을 꿇고 교육권을 호소했다. 지역에서 장애인 공교육을 담당할 특수학교는 기피시설이 되었다. 발달장애에 대한 낙인이 강한 사회에서 부모들이 소리 높여 인권을 외쳤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을까?
장애여성학자 수전웬델은 “전형적인 시민에게 주어지는 것과 비교할 때 종류나 다른 양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의존적이라고 간주 된다”고 말했다. 생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낙인은 지속적으로 ‘복지의존’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강화한다. “살기 나아졌으니 국가에 그만 요구하라”고 어떤 이들은 훈계한다.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늘 최소값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더 많은 권리의 요구는 문제로 비쳐진다.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는 모습이 때론 혼란을 야기하는 무질서한 행동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할당된 몫을 받으며 침묵할 때는 동정 받을 자격을 갖지만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순간 혐오는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니 차별받는 순간에도 이상한 장애인이 되지 않기 위해 예의와 정중함으로 자격을 증명해야 했다. 이런 사회라면 혐오표현에 맞서는 것은 개인의 과제로 남겨지고 반차별과 평등의 가치는 시혜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혐오는 이제 시대적 과제다. 국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선언하는 것은 혐오와 차별에 맞서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혐오는 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략) 그래서 소도미법은 이른바 올바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에 혐오감을 느낀다는 단순한 이유로 옹호되어 왔다. 사회가 지닌 혐오는 다른 근거에서 이미 불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행위의 범주에 대한 법률적 주장에서도 나타난다.”는 마사 누수바움의 말처럼 국가는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면서 끊임없는 규범과 범주를 공식화시켜왔다. 여성/남성, 장애/비장애, 자국민/이주민, 이성애자/성소수자, 성인과 청소년, 정상가족/비정상가족 등을 범주화하고 관리하면서 구분과 차이를 자연화 시키는 방식의 통치를 해왔다. 동성 간 성행위를 금지하는 군형법, 장애인의 재생산을 규제하는 모자보건법 14조,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용허가제, 결혼이주와 관련된 정책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가 그 예다.
그러니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은 법을 만들기 위한 싸움이면서도 법과 싸우는 운동이 될 것이다. 국가권력만을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평등을 지향하는 문제의식과 만나고, 다양한 주체들을 만나려는 노력이 계속 되어야 한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은 공동체 안에 타인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기도 하다.

하반기 차제연은 9월 12일 제정촉구 서명운동 선포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주중 낮시간 광화문 사거리에서 전개한 차별금지법제정촉구 서명캠페인은 전국 곳곳, 대학, 단체로 퍼져 나가 제정을 염원하는 많은 이들의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 1회는 집중행동의 날로 서울역 귀향선전전, 촛불 1주년 인권궐기대회, 노동자대회에 연대하며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와 국회가 만지작거리다 내팽개친 차별금지법, 우리가 제대로 만들어 보자는 다짐은 전국 지역 간담회로 이어져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의 의미와 방향을 토론했다. 개헌토론, 자유한국당 국가인권위법 개정 발의 성소수자 체육행사 대관 취소, 유엔 사회권위원회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 인권위 노키즈존 아동차별 결정을 평등과 반차별의 가치로 해석하는 논평 활동도 꾸준했다. <차별금지법제정운동 10문 10답> 소책자는 현재까지 7천부 가까이 전국으로 발송되었다.

12월 9일에는 한국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세계인권선언일 맞이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대회> 첫 단독 집회가 열려 300명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춤을 췄다. 한 해 동안 모인 운동의 힘을 내년에도 잘 이어가 제정을 이루어내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갈 더 큰 힘을 일구어야겠다.

몸에 남은 차별과 혐오의 기억들은 분노와 슬픔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평등이 위협당하는 순간을 잘 알아챌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구조적으로 익숙한 혐오를 평등의 감각으로 일깨워주는 사람들. 혐오와 차별로부터 우리를 보호했던 마스크는 이제 스피커가 될 것이다. 정중한 피해자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증거자로 주체에 선, 혐오에 맞서, 차별의 경험을 말하고, 평등의 가치를 일구어 나가는 우리 모두 증거자이자, 평등 세상의 주인공이다.

※ 글을 보내주신 이진희 님은 장애여성공감 활동가이며,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