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6-05 13:28
[101호] 인권포커스 - 우리가 잃은 것은 블랙리스트라는 쇠사슬 뿐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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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은 것은 블랙리스트라는 쇠사슬 뿐
- 20미터 교각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하청노동자들과 하청노조의 다짐 -

이형진


4월 11일 새벽 5시경.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둠 속. 가방을 짊어진 노동자 둘이 20미터 교각 위로 올랐다. 울산 동구의 길목, 남목 성내삼거리 고가도로를 떠받치는 P10번 기둥.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을 오가며 십 수 년 동안 배를 만들어 온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인 현대중공업 하청노조 조합원 전영수 조직부장과 이성호 대의원. 이들이 난간에 제일 먼저 내 건 현수막은 “비정규직 철폐! 노동기본권 보장!”, “대량해고 중단! 하청고용 보장!”이었다. 이 글은 왜 고공농성을 시작하게 됐는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를 인권운동연대 회원들께 소개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연대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현대중공업 하청노조는 대량해고 구조조정 중단과 하청노조 조합원 복직을 요구하며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무기한 노숙농성을 진행해 왔다. 2016년 7월 25일부터 시작했으니 2017년 5월 20일이 노숙농성 300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구조조정을 핑계로 한 단체교섭 중 폐업과 조합원 솎아내기 식 고용승계 배제, 그리고 원청의 블랙리스트로 사내하청업체 재취업을 원천 차단하는 방식으로 조직부장, 노안부장, 대의원, 현장위원 등 주요간부 13명이 해고를 당했다. 앞으로도 해고자가 계속 발생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결국 20미터 교각에 오를 수밖에 없었고, 5월 20일로 고공농성 40일이 지났다.

현대중공업 하청노조는 중공업과 미포조선의 2만7천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가입대상으로 하는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조합원 수는 1%도 안 되는 2백여 명 수준이다. 왜 이렇게 적을까? 바로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의 하청노조 블랙리스트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3년 8월 하청노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운용되고 있는 사례와 증거, 증언들이 넘쳐나고 있다. 특히 2003~4년에 하청노조 조합원이 속한 업체를 위장폐업 시키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재취업을 가로막았던 일은 2010년에서야 대법원으로부터 원청 현대중공업에 의한 부당노동행위로 판결이 났다. 그러나 생계 때문에 이미 수 백 명의 하청노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였다. 모든 하청노동자들에게 하청노조에 가입하면 업체가 폐업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밥줄이 끊긴다는 공포가 각인되고 난 뒤였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었다.

블랙리스트는 노동3권을 무력화하고 노동기본권 자체를 말살하며, 취업방해로 생존권을 박탈하는 그야말로 청산해야할 ‘노동적폐’ 1호이다. 현행법 위반 사항으로는 근로기준법 제40조(취업방해의 금지) 위반과 개인정보 보호법 제23조(민감정보의 처리 제한) 제1항 위반이며, 헌법 제33조에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중대 범죄 행위이다. 하청노조는 이번 고공농성으로 현대중공업의 블랙리스트를 뿌리 뽑기 위해 정면 돌파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지 않고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월 24일 국회 앞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의 사내하청노동자 블랙리스트 작성 등 범법 행위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 실시 및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노동당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리고 정몽준(현중그룹 최대주주), 권오갑/강환구(현대중공업 대표이사), 한영석(현대미포조선 대표이사)을 지목해 이들을 형사 고발하기 위한 시민고발인단 모집에 돌입했다. 5월 8일에는 김종훈 국회의원과 함께 ‘현대중공업 블랙리스트 국정조사 추진’ 입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김종훈 국회의원은 현대중공업을 필두로 주요 대기업들의 노동계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해 각 정당의 국회의원들과 공동으로 대선 직후 대대적인 국정조사가 실시되도록 추진하고, 이 과정에서 밝혀지는 사건들에 대해 당사자들과 함께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하청노조 하창민 지회장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증명하는 녹취록 증거자료를 공개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지원 배제의 문제였지만, 노동계 블랙리스트는 생존권 박탈의 문제”라며, “블랙리스트에 철퇴를 내리고, 총괄 대표자들과 관련 책임자들은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엄중히 규탄했다.

고공농성 당사자인 전영수 조직부장과 이성호 대의원은 현중과 미포를 오가며 사상공(그라인더)으로 십 수 년을 일해 왔다. 본공(1차 하청 상용직)으로도 일했고, 물량팀(2~3차 하청 일용직)으로도 일했다. 그러나 4월 9일 현대미포조선의 업체 폐업으로 결국 타 업체 이관과 고용승계에서 배제되고, 사내하청업체 개별 취업도 모두 가로막혔다. 이들이 교각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업체에 이력서를 내며 구직활동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원청이 직접 막고 있어서 고용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공농성이 두 달을 향해 장기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은 관련도 없고 책임도 없다며 묵묵부답이다. 그런데 관련이 없다면서 왜 원청 관리자들이 수시로 농성장의 동향을 살피며 감시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고공농성자 두 명은 매연과 먼지, 진동, 소음, 강풍이 끊이지 않고, 생리현상의 해결조차 여의치 않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끝까지 결사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하청노동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이를 대표하는 하청노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결사항전으로 잃은 것은 블랙리스트라는 쇠사슬뿐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블랙리스트를 뿌리 뽑자!

※ 이형진 님은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사무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