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3-02 17:07
[98호] 여는 글 - When they go low, we go high!!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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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y go low, we go high!!

송혜림


지난 1월을 미국 오레곤주에서 지냈습니다. 미국은 마침 오바마 전 대통령 퇴임식과 트럼프 현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때라 분위기가 더욱 역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카고 오바마 퇴임식에 참석하고자 애썼던 한국 유학생들의 모험담(?)도 들려왔고,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날은 시내에서 시위가 있다고, 시내 가려면 어떤 시간대는 피해야 한다는 소식도 전해들었지요. 제가 머물던 곳의 주립대학 학생들은 지난 학기 트럼프 반대 시위 때문에 캠퍼스가 너무 시끄러워 수업 듣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가 한 말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그들은 저급하게 갈 지라도 우리는 웃질로 가자, 뭐 이 정도?

시간 될 때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가면 매번 큰 감동과 책임감을 갖고 돌아오게 됩니다. 지평선도 수평선도 저 멀리 끝은 보이기 마련인데, 광장의 촛불은 도무지 그 끝이 안 보여서, 이건 뭔가 싶은 놀라움과 두려움 그리고 같은 길을 함께 가는 길동무들의 소중함, 뭐 그런 느낌들. 다같이 동시에 불을 껐다 다시 켜는 순간의 그 감동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듯 싶습니다. 아예 토요일 오후의 만남을 광화문으로 정해놓기도 하고, 오전 모임의 마무리는 자연스럽게 광화문광장에서, 오랜만의 동창회도 그 곳에서 하고, 거기에서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때로는 어떤 이들의 아픔과 슬픔 앞에 함께 눈물 흘리며 걷다가 걷다가 보면, 집회와 축제와 만남과 공감이 어우러지는 어느 순간을 보게 됩니다. 세련되고도 고급스런 집회문화라고나 할까요.

다시 지난 1월 미국, 이번에는 한국인인 저를 보고 말 걸어오는 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학교 캠퍼스에서 만난 젊은 대학생들 그리고 시내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국인인 저에게 광화문 촛불집회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물어보던데요. 제가 집회 참석 인증사진을 보여주니 무슨 연예인 쳐다보듯...굳이 표현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보다는 국민, 즉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우리 촛불집회 사진을 캡처해서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기도 한 그들의 관심도 신기했지만, 제가 더욱 유심히 본 것이 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집회 현장의 사진 중에서 주로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 어린 아이 손을 잡고 참석한 가족들,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 그리고 노인들 사진을 더욱 놀라운 눈으로 저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는 젊은 청장년층 중심의 집회가 아닌 다양한 연령이 포함된 집회, 특히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약자들이 두려움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그 장면이 더욱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지요. 약자가 포함된 집회가 폭력적일 리 없고, 위험할 리 없다는 그들의 당연한 인식 앞에서, 저는 우리 집회의 역사가 과연 항상 약자의 인권이 존중되었던 그런 것이었나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뭐, 어쨌거나 이제는 웃고 노래 부르고 때로는 함께 울고 촛불을 켰다 껐다 이벤트까지, 그 어려운 걸 멋지게 해 낸 대한민국 국민들을 그들이 나름 부러워하고 있다는 뜻으로 그냥 제가 이해해 버렸답니다.

오래 전, 독일 유학시절 지도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늦더라도 약자와 함께 가는 것에 대한 국민의 합의 정도가 그 사회의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는...

아직 진행 중인 촛불집회가, 미성년 자녀와 함께 노부모를 모시고 가도 되는, 그런 안전한 소통의 장으로 계속되기를 바래봅니다. 누군가는 폭력적이고 저급할 지라도,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서 평화를 지켰던 우리는 어쨌든 그렇게 자녀들에게 물려줄 웃질 집회문화 하나를 만들어 놓았으니, 기필코 지켜내야겠지요.

※ 송혜림 님은 울산대학교 교수이며, 울산인권운동연대 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