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1-02 14:54
[96호] 여는 글 - 2016년 세밑에......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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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세밑에......

오문완


날마다 새로운 사건들이 터지는(아니, 밝혀지는) 통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나날입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벌써 세밑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글로 ‘여는’ 글을 쓰라니 이 또한 묘한 느낌이 듭니다. 잠깐이라도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역시 쉽지는 않네요.

인권연대는 올해 어떤 일을 했나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인권마라톤은 성황리에 마 무리했고, 세계인권선언 선포 기념주간에는 세월호와 핵발전소 문제를 놓고 인권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탄핵신청이 의결돼 어수선한 가운데 그래도(?) 많은 사람들 이 같이 얘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핵발전소 반대를 위한 활동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연대 사무실에서 고리 핵발전소까 지 행진한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인권학교에서는 유우성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고문 의 역사를 더듬은 <자백>을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쾌거도 있었군요. 너무나도 친숙한 김 기춘 전 비서실장,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모습에서 일종의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작가와의 대화에서는 인권활동가 류은숙 작가를 모셔 <심야인권식당>과 <일터 괴롭힘> 을 이야기하고 술 한 잔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것도 좋은 추억입니다. 아, 이제 독서토론 은 제 궤도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학생독자를 찾아내 함께 하는 시간으로 발전되기를 바랍 니다. 대학생 인권논문대회도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대학생 인권강좌도 꾸준히 열고 있 구요. 이렇게 쓰다 보니 사업 보고서가 되고 마는군요. 자그마한 조직이 엄청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고 자찬을 하면 너무 나간 걸까요.

연대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무실에서 쫓겨날 때를 대비해 일일호프를 열고(얼마 되지 는 않지만) 종자돈을 마련한 것도 큰 사건이네요.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 니다. 회원 사업부는 아니더라도 회원을 잘 모시는 담당자가 필요한 때가 온 것 같습니 다. 기억이 남는 기행은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무대가 된 야쿠시 마 섬을 찾은 일입니다. 긴 여정을 짧은 시간 내 소화하다보니 엄청나게 힘이 들긴 했습니다만(탈진?!)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인권이라는 책을 쓰기로 했는데, 이 작업은 언제나?

탄핵 정국은 새해에도 이어질 모양입니다. 그럼 새해는 희망의 나날일까요? 대한 민국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고 이 사회를 제대로 된 곳으로 바꾸는 작업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루쉰(노신)의 말을 베껴봅니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 이 되는 것이다.” <고향>이라는 소품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입니다.
루쉰에게 희망은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보통은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니 누군가 걷기 시작하고 남이 따라 걸으면 길이 생기는 터라 우리 삶은 희망적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없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이야기한다. 암흑을 이야기한다”(서경식의 <시의 힘>, 109쪽).
그런데 ‘절망’을 말할 때도, “이런 짓을 해봤자 아무런 희망도 없어. 절망.”이라고 하는 것과, 루쉰이 말하는 ‘절망’과는 같은 단어이지만 쓰임새가 전혀 다르다고 합니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말에서 절망밖에 읽을 수 없건만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느낀다고 말합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일신의 이해, 이기(利己)라는 것을 떨쳐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같은 책, 110쪽).

중요한 것은 ‘나아가면서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여기’서부터 길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동시대의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만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시간입니다.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나가야 할 때라는 얘깁니다.

인권을 얘기하자면 차이와 차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빅토리아 시기 영국에서 사제이면서 시인의 삶을 산 제라드 홉킨스(Gerard Hopkins)라는 분의 시를 다시 읽어봅니다.(재작년 세밑에 한 번 읽었습니다)

<인스케이프>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다르고 독특하고 희귀하고 낯설구나.
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고, 밝거나 어둡구나.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누구의 뜻인가?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세밑 마무리 잘 하시고, 희망의 새해를 맞읍시다.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겁니다.

※ 오문완 울산대 교수님은 울산인권운동연대 공동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