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2-10 15:21
[62호] 여는 글 - 2014년 울산인권운동연대에 바라는 것
 글쓴이 : 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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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울산인권운동연대에 바라는 것


오문완 l 공동대표



올해 울산인권운동연대에 바라는 것이 무언지 써달랍니다. 하늘 아래 무어 새로운 게 있겠습니까? “작년 얘기 그대로다”라고 하면 그만인데 그래도 글을 쓰라니 몇 자 적어봅니다. 결론은 역시 ‘작년 얘기 그대로’입니다.

저는 사자성어에 관심이 많아 연말이면 교수신문이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봅니다. 작년 말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말씀은 '도행역시'(倒行逆施)랍니다.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이라네요. 12월 22일자 교수신문은 12월 중순에 전국의 교수 6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2.7%(204명)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행역시'를 꼽았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격'이란 뜻의 '蝸角之爭(와각지쟁)'이 22.5%(140명)로 2위, '가짜가 진짜를 어지럽힌다'는 의미의 '以假亂眞(이가난진)'이 19.4%(121명)로 3위,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완고하게 일을 추진한다'는 뜻의 '一意孤行(일의고행)'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교수들이 지난 한 해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감이 오시겠지요.
도행역시는 사기(史記)에 실린 고사성어로, 춘추 시대의 오자서가 그의 친구에게 ‘어쩔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부득이하게 순리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고 말한 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군 오자서는 자신의 아버지와 친형이 초 평왕에게 살해되자 오(吳)나라로 망명해 오왕 합려의 신하가 됩니다. 초나라를 공격해서 수도를 점령한 오자서는 원수를 갚고자 평왕의 무덤을 파헤친 뒤 그의 시신에 300번의 채찍질을 가했다고 합니다. 이에 친구 신포서가 오자서의 행위를 비난하자, 오자서는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어서(日暮道遠)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지만 부득이하게 순리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倒行逆施)"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과거는 흘러갔고 그 과거를 거울삼아 올해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게 우리의 과제가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결론은 작년대로. 저는 작년에 보행권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보자고 제안했었고 이제 슬슬 몸을 풀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몇 년 전부터 가동을 한 ‘기업과 인권’은 좀 더 박차를 가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국시장에서의 과장광고로 엄청난 배상금을 합의한 모 자동차회사의 경우에서처럼 이제 인권경영이라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업을 보는 시각 자체의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을 하나의 광야로 보았으면 합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광야에 섰을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는 모습인데, 결국 그 1세대 히브리인들은 어느 누구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밟지 못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누구는 하느님의 시험이라고 얘기하고 누구는 스스로 초래한 일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떻게 이해하든 위험과 기회라는 선택이 다 가능하고,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공리주의에 대한 발상의 전환 역시 필요합니다. 한 때 각광을 받았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주된 타겟도 공리주의였고 그것을 넘어서자는 주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되어도 좋다는 발상의 전환 없이 새 세상을 만들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올 한 해는 과거의 사업을 평가하고 공부하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독서 모임도 더욱 활성화(양으로나 질로나)되기 바랍니다. 회원들의 적극 참여로 토론하고 그 토론의 결과 합리적인 대안을 만드는 인권의 장이 형성되기 바랍니다. 합리적인 대안은 사실(fact)을 사심 없이 사실대로 평가하는 데서 시작되고, 그 바탕 위에 진실(truth)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사족으로 유토피아(Utopia=no where)는 지금 여기(now here)라는 말은 농담이 아닌 진실입니다. 단, 행동이 그렇다는 것이고 결과는 꼭 지금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요. 정책의 효과가 곧장 나타난다고 믿는다면 너무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과욕이라고 해야 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