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3-13 10:43
[42호] “어느 학교 몇 학번이세요?” - 학벌과 학연이 만들어 낸 차별과 배제 -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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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죄로 감옥에 갔었던 송경동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스무 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이하 생략)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많은 사람들이 학번을 묻는다. 나에게도 학번이라는 게 있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땐 왠지 불편해진다. 질문을 받은 내가 학번이란 뜻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대학 문턱 근처에 가보지 않아 학번이란 게 있지도 않은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저런 질문을 하나 싶다.
고등학교를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도 있다. 울산에서 나왔다는 말을 하면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는 질문이 바로 나온다. 그런데 나는 대답을 꺼리는 편이다. 나와 같은 학교 출신들에게 좀처럼 정을 붙이기가 힘들어서였다. 여러 이유들이 있다. 우선 진보정당의 당원인 나에게 지역에서 보수정당 정치인들이 대부분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동문회를 나가지 말자면서 학연을 원천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하나의 차별과 다른 이들과 구별 지어 배제시키는 것이 영보기 싫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격담에서 시작했다.
같은 학교를 나온 한 선배가 있었다. 진보정당의 당원이었다. 모 지역에서 같은 학교 선배가 국회의원으로 나오자 국회의원 후보가 된 그를 도왔다. 국회의원 후보가 속한 정당도 같은 정당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보정당이었다. 나는 그가 정치적인 이념이 달라져서 그런가 보다 했다. 알고 보니 아니었다. 원래 속한 정당을 탈당하지도 않은 채 그 국회의원 후보를 도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 국회의원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내가 나온 학교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 국회의원 후보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다들 모인 것이다. 그 모습이 나에겐 학연을 내세운 아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보였다. 같은 학교를 나왔기에 그 정을 앞세워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같은 학교 정치인의 영달을 위해 학연을 내세운 것이고 정치적인 이념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는 것은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차별하고 배제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학교와 학번을 묻기 전에 한번만 생각하자. 나의 질문이 남에게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로 보일 수 있고 상처로, 차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거창한 ‘해방전선’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 글을 써주신 김석한 회원은 <인?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