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30 10:55
[197호] 여는 글 - 모두가 모두의 일상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다시 만난 세계”
 글쓴이 : 사무국
조회 : 20  
모두가 모두의 일상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다시 만난 세계”

신강협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휠체어를 타거나 걸음걸이가 이상하거나, 말투가 어눌하거나, 앞을 잘 못 보는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들은 동정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기도 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동정이든 연민이든 연대든 간에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럽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연민과 연대의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사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세상살이는 구조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주아주 불편한 세상이라는 것을….

얼마 전 혜화동 성당 종탑에서 장애인단체 활동가들이 장애인 ‘탈시설’을 거부하는 천주교에 항의하는 무기한 고공농성에 돌입했다가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주장은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어떠한 수식어를 달고 있든지 간에 그저 일상의 삶이 가능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뭔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친구를 자유롭게 만나고, 직장에 나가 일하기도, 주말이 되면 늘어지게 잠만 잘 수도 있는 그런 일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사회복지협의회는 ‘탈시설 로드맵’을 반대하는 주장을 발표했다. 그에 대응하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의 활동가들이 혜화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였다. 한국천주교의 한 주교님은 “탈시설은 중요하고 필요하며, 장애인 개개인을 온전히 존중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천주교의 주장을 설명하였다. 전장연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장애인 개개인들의 삶이 존중될 수 있는 탈시설 정책을 추진하라’는 주장이다. 기본적으로 양측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존중과 배려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교님의 말에는 다른 수식어가 달려 있다. ‘그 목표와 의도가 장애인들을 획일적으로 관리해서는 안 되며, 탈시설이 불가능한 분들이 시설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식의 첨언이 붙어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 발표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에는 “당사국은 모든 형태의 시설 수용을 폐지하고,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해야 하며, 시설에 대한 투자를 막아야 한다. 시설 수용이 장애인의 보호 조치 혹은 ‘선택’으로 고려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이 어떠하든 간에 바로 탈시설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해야 할까? 이 부분을 천주교 측은 ‘강제적인 탈시설’ 혹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현실적으로 거주시설의 필요성과 지역사회서비스 확장이 크게 부딪히는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유럽연합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장애인 거주시설이 없는 나라는 스웨덴뿐이라고 한다. 탈시설 정책을 추진한 미국, 영국, 캐나다, 스웨덴, 일본의 경험에서 보면 거주시설 정책과 사회서비스 확장 정책의 조정은 쉽지 않다고 한다. 난제인 셈이다.

하지만 주교님의 말처럼,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의 언급처럼 ‘장애인 개개인을 온전히 존중’하기 위해서는 탈시설 정책의 추진은 시대의 흐름으로 보인다.

사회 복지 제도의 논쟁을 뒤로하고, 인권의 눈으로 보자면 천주교 측의 ‘탈시설이 불가능하신 분’이라는 기본 전제는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세상은 온갖 불편함이 가득한 세상이다.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고 판단된 사람들에 의해 구조화된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일부 사람들은 ‘탈시설이 불가능해진 사람’으로 판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이미 불편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오히려 사람의 보편적 조건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탈시설이 불가능하신 분’의 선택이란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과 자유로운 선택’은 있다.
탈시설 정책 관련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2025년이 되면 미국 내에서 16인 이상의 주립 장애인 거주시설은 소멸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미국 사법부의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 복지 논쟁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기본적 인권을 더 중요하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립생활이 불가능하다고 규정된 사람들의 권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자립생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판단이 앞섰기에, 사회 구조를 그렇게 바꿔 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미 불편함이 매우 심화된 우리 사회 구조를 일순간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지금의 현실에서 탈시설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처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는 모든 사람들의 매우 일상적인 삶이 가능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 천주교회가 지금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의 역량을 거주시설의 운영에 쓸 것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 사람에게 사회서비스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해보면 어떨까 싶다.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를 맞이하면서 광장에 새로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우리가 다 같이 따라 불렀던 ‘다시 만난 세계’를 이제 우리는 정말로 다시 꿈꿔야 하지 않을까? 불편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기만 했던 세상에서 이제 우리는 모두 함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동정에서 연민으로 가는 세상을 넘어 이제 모두가 동등한 세상이 돼야 하지 않을까? 동등한 사람들의 동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광장에 우리 모두 서 있다는 현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바꿀 기회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사회적 논쟁이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다.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 중에서 -


※ 신강협 님은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