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30 10:53
[197호] 인권포커스 - 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재난의 의미를 묻다」
 글쓴이 :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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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재난의 의미를 묻다」

# 이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인권교육센터 들’이 연구하여 제작된 <재난인권교육을 여는 안내서 ‘재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시간’>의 1부. 재난을 말하는 인권의 문법 중 1. 재난의 의미를 묻다를 정리한 글입니다.

편집위원회


아리셀 공장 화재, 경북·경남·울산 산불재난, 광명 신아산선 붕괴사고, 땅꺼짐 현상 등 재난은 갈수록 다양한 얼굴로 시민의 일상에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우리는 재난이 일상화된 위험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재난인권교육을 여는 안내서 『재난. 인간의 존엄을 묻는 시간』 중 「재난의 의미를 묻다」를 소개하고자 한다.

1-1. 재난의 정의들

☐ 일상에서 사용되는 ‘재난’의 의미

일상에서 사용되는 “재난의 의미는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으로 느닷없이 닥친 안타깝거나 비통한 일과 그로 인해 발생한 유·무형의 고통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마감을 하루 앞두고 실수로 보고서 파일을 영구 삭제해 버렸다. 보증을 선 지인이 공장을 부도내고 해외로 도피해 버렸다. 이러한 것은 한 개인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지만, 사회적 의미의 재난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한 공동체를 충격이나 어려움에 빠뜨리고 국가의 비상한 대응이 요구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일을 사람들은 재난으로 여긴다. 즉, 어떤 일이 ‘재난’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요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가가 어떤 위기 상황을 재난으로 선포하고 개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도 법적 기준,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정부 당국의 해석, 피해자의 요구나 움직임, 여론의 동향, 상황에 대한 국가 책임의 유무 등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의 의미는 계속 구성되는 것이며, 완성된 정의란 불가능하다.

☐ 국내·외 규정 속 재난의 정의

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약칭:재난안전법)」이 말하는 ‘재난’의 정의

2004년 처음으로 제정된 「재난안전법」에서의 재난은 제3조1항에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규모· 중대성을 지닌 피해나 위기여야 재난이 되는지는 법률에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재난안전법」은 재난을 태풍, 홍수, 지진, 황사, 폭염 등을 ‘자연재난’, 10·29 이태원 참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사회재난’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재난안전법」 제정 당시에는 ‘사회재난’이 명시되지 않았다. 2013년 8월 6일 개정을 통해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이 법적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자연재난의 경우는 책임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전적으로 피해 지원에 나서야 하지만, 사회재난의 경우는 원인 제공자에게 피해에 따른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재난’의 양상들은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미세먼지는 자연재난과 사회재난 중 어디에 속할까? 비록 법에서는 사회재난으로 두었지만, 실제 고농도 미세먼지의 발생 원인과 책임 소재, 배상 책임의 비율 등을 명확히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➁ 국제기구의 정의
재난에 관한 통일된 국제적 정의 역시 존재하지 않지만, 재난 관련 국제기구들인 유엔재난위험경감 사무국, 유엔 국제법위원회「재난 상황에서의 사람의 보호를 위한 규정 초안 및 해설」,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기후 변화 맥락에서 재난 위험 감소의 젠더적 차원에 대한 일반논평 37호」의 정의에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 재난의 발생 원인과 과정, 규모·빈도·속도에 상관없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나테크 디재스터(Natech disaster), 테크나 디재스터 (Techna disaster)와 같은 자연·기술복합재난이라는 새로운 재난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참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동일본 대지진이 불러온 거대한 쓰나미가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덮치면서 전원이 꺼지고 냉각수 공급이 중단되면서 노심 용융(melt down)으로 폭발이 일어나 대규모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이처럼 재난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본 것을 종합하면,
‘사람과 비인간동물, 자연 등에 일정 규모 이상의 중차대한 피해를 야기하고 공동체에 심각한 충격과 영향을 미친 재앙적 사건 또는 그러한 사건의 연속’이라고 정의 되어진다.

1-2. 혼재된 개념들 : 사고, 사건, 참사 그리고 재난

삼풍백화점 붕괴와 허베이스피리트호 원유 유출 사건은 ‘사고’, 10·29 이태원 압사 사망, 오송 지하차도침수,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노동자 사망은 ‘참사’로 불린다.
그렇다면 사고와 사건은 어떻게 다르며, 참사와 재난은 어떻게 다른가?

신형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사고와 사건에 대해 -개가 사람을 무는 일처럼 ‘사고’는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내포하고 사실(fact)의 확인이 초점이며, 사람이 개를 무는 일과 같은 ‘사건’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며 사실들 사이의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적합하게 밝히는 진실(truth)의 추출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고 했다.
어쩌다 일어난 불행한 변고라는 의미의 사고가 사건으로 인식되려면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고, 그 사건의 충격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사회의 민낯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참담한 마음이 집합적 힘을 가지며 사회의 관심을 촉발하는 운동이 존재할 때 비로소 사건은 ‘참사’로 인식되고 불리게 된다.

한 사회가 특정 사건을 얼마나 큰 사회적 무게와 긴급성을 요구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사건들 사이의 연쇄 고리를 어떻게 감각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로 정치적 선택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 재난인지 아닌지가 달라지는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참사로 불리는 사건들을 보면 세월호 침몰이나 울진-삼척 산불과 같은 재난으로 인한 참사, 재개발구역 철거 농성장에서 경찰의 강제 진압 도중에 철거민과 경찰 6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 같은 국가폭력에 의한 참사.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사망 사건과 같은 노동재해 또는 중대재해 참사 등 다양한 유형의 참사가 존재한다.
모든 재난이 참사로 이어지지 않고 모든 참사가 재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되, 재난과 참사의 근접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로 ‘재난·참사’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